2025년 7월, 웨일스 성공회는 체리 밴(Cherry Vann)을 새로운 대주교로 선출했다. 그는 영국 교회사상 최초로 여성이며, 공개적으로 LGBTQ+ 정체성을 밝힌 인물이다. 언론은 이를 “포용의 진보”라며 높이 평가했고, 많은 이들은 교회가 다양성과 평등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에 입각한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정통 교리를 신실히 고백하는 공동체에겐 이 결정이 오히려 깊은 우려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성향이나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과 진리의 권위에 대한 근본적인 붕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 세계 최초의 레즈비언 대주교


성경은 거룩함의 기준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는다. 하나님께서 제사장과 장로, 감독에게 요구하시는 자격은 단지 인간적 능력이나 경륜이 아니라, 삶의 거룩함이다. 동성애적 행위와 정체성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일관되게 죄라고 선언하고 있다(레위기 18장, 로마서 1장, 고린도전서 6장 등). 그리스도의 종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전할 뿐 아니라, 삶으로도 그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딤후 2:15). 체리 밴이 어떤 사역의 열매를 맺었든, 그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축복받은 정체성’으로 선포하며 교회를 대표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은, 신약 교회의 질서와 교리적 기준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다.

오늘날 교회는 “사랑”과 “포용”이라는 말을 자주 내세운다. 물론 그것은 복음의 본질 중 하나이다. 그러나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의 기준을 무너뜨리는 것은 거룩한 사랑이 아니라, 편리한 타협일 뿐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지만 죄를 미워하셨다. 그는 창녀에게도 자비를 베푸셨으나,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요 8:11)고 말씀하셨다. 회개 없는 수용은 축복이 아니라 방임이며, 복음 없는 포용은 교회의 정체성을 흐린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능력임을 강조한다.

일부 진보 진영에서는 다양성과 포용을 교회 일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자고 한다. 그러나 진리 없는 다양성은 무질서이고, 성경 없는 포용은 결국 해체로 이어진다. 실제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보수적 성공회 교단들은 체리 밴의 선출에 대해 강력한 반발을 표명했고, 일부는 앙글리칸 커뮤니언에서 탈퇴를 고려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로 기준을 해체한 교회는 결국 그 사랑조차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거룩함을 포기한 사랑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교회를 살리는 길인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요구하신 거룩함은 여전히 유효한가? 진리를 지킨다는 것이 왜곡된 사랑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가? 복음은 시대정신에 따라 변형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시대를 거슬러 외치는 불편한 진리이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박수를 받는 순간,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그 박수는 과연 그리스도를 향한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똑같아진 교회를 향한 것인가?

체리 밴의 선출은 세계 교회가 맞이한 하나의 시험이다. 우리는 진리 위에 설 것인가, 문화에 굴복할 것인가? 복음주의 신앙은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축복할 수는 없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되 사랑으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말해야 한다. 사랑은 정죄하지 않되, 죄를 죄라고 말하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 용기를 잃은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소금도 빛도 아니다.

이 시대 교회는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회개 없는 수용이 아닌, 진리를 향한 부르심으로. 거룩함을 회복하는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릴 수 있다. 지금은, 바로 그 회복을 외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