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의 관계가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사람과는 너무 가까워져서 지치고, 어떤 관계에서는 거리감이 커져 외로움이 깊어진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라는 건 단순한 감정 조절이 아니라, 마음의 건강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주제다. 요즘 심리학과 상담학에서는 이런 관계 속의 '경계(boundary)' 개념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
건강한 경계를 갖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십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헨리 클라우드와 존 타운센드의 『Boundaries』 시리즈는 경계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거기서 말하는 경계는 타인을 밀어내는 차단선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책임, 자원, 선택을 스스로 인식하고 건강하게 보호하는 선이다. 경계는 ‘내가 할 일’과 ‘상대가 할 일’을 구분하는 선이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넘겨야 할 책임’을 명확하게 정리해 준다. 이런 경계는 신앙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하나님은 각자의 경계를 인정하시는 분이다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독립적 존재다. 각 사람은 고유한 성격, 은사, 책임 영역을 가지고 있고, 그걸 넘어서거나 침범당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과도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율성과 책임을 함께 부여하신다. 가정이나 교회, 일터에서 자기 역할을 인식하고 건강하게 수행할 수 있으려면, 우선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충분히 존중받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경계의 출발점이다.
2. 사랑은 무경계적 희생이 아니라 자기 돌봄에서 시작된다
마태복음 22장 37~39절에서 예수는 가장 큰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한다. 그런데 그 구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자신 같이’이다. 성경은 자기 자신을 무시하거나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건강한 자기애 없이 건강한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다.
심리학적으로도, 경계가 약한 사람은 종종 타인을 지나치게 도우면서 내면에서는 수치심, 분노, 탈진을 경험한다. 외적으로는 친절해 보일 수 있지만, 자기 정체감이 약해지면서 결국 관계는 왜곡된다. 예수의 사랑은 자기를 지우는 희생이 아니라, 자기 자원을 하나님과 함께 건강하게 유지하면서 흘려보내는 사랑이다. 이것이 경계를 세우는 이유다.
3. 경계는 영적 분별력에서 시작된다
잠언 13장 20절은 말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입는다.”
성경은 모든 사람과 무조건적으로 가까이 지내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감정, 신념, 선택, 반응의 경계가 다르기에, 관계는 언제나 분별이 필요하다.
특히 반복적으로 감정적·정서적 침해를 일으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분리와 선 긋기가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책임 구분’이다. 상담심리학에서 ‘투사된 책임’을 잘 다룰 줄 아는 것이 건강한 자기 보호의 기술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분별력을 주시고,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어떤 관계를 멈춰야 할지를 인도하신다.
4. 예수는 건강한 경계의 모델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치유하고 가르치셨지만, 항상 몰려드는 무리 가운데서 자신을 잃지 않았다. 마태복음 14장 23절은 예수가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한다. 때로는 요청을 거절했고, 때로는 조용히 물러섰다.
예수는 ‘필요함’과 ‘하나님과의 연결’ 사이에서 경계를 세웠다. 필요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기대를 더 중요시하지 않았다. 사랑하면서도 죄를 허용하지 않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균형은 우리 삶의 경계 설정에도 본보기가 된다.
경계는 신앙의 열매이자 도구이다
경계는 단지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와 사명을 분별하며 살아가기 위한 태도이다. 내 마음을 돌보고, 책임을 나누고,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온다.
하나님은 내가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단단함은 경계를 통해 세워지고, 부드러움은 사랑을 통해 흘러간다. 경계는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