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사막과 척박한 영혼의 땅 오만. 그곳에서 오늘도 이름 없는 이들을 향해 묵묵히 사랑을 흘려보내는 선교사가 있다. 태권도 도장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를 회복시키는 일. 기적 같고 드라마틱한 변화들이 그곳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오만에서 사역 중인 조갈렙 선교사님의 긴 여정을 따라가며, 선교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보는 시간이었다.
Q. 선교사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역자로서의 부르심이 유년시절에 결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A. 제 인생의 첫 콜링은 초등학생 시절인 것 같습니다. 그때의 한국교회는 부흥회의 열기로 가득했지요. 담임목사님의 정중한 설교와는 또 다른 열정적인 부흥강사님들의 메시지를 사모하며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흥회 강사님께서 “이 자리에서 목회자가 될 사람 손들어 보세요!”라고 외치셨습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번쩍 들렸고, 강대상에 올라가 축복기도를 받았던 그 순간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날 이후 제 마음속엔 목회자의 꿈이 자라기 시작했죠.
Q. 그 이후의 유년 시절 신앙생활이 궁금합니다.
A. 제 신앙의 뿌리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있었던 강남교회입니다. 수요예배, 철야예배, 새벽기도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새벽에 교회로 향하던 기억도 참 따뜻하죠. 하지만 고3 때, 하나님과 교회를 잠시 떠나 세상의 자유를 맛보며 방황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간경화로 고통받으시며 가족 모두가 절망의 시간을 보냈고,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해 제 마음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Q. 제가 알기로는 대학 전공이 경제학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학을 다시 선택하게 되셨는지요?
A. 고3이 되던 해, 개척교회 목사님의 어려운 삶을 지켜보며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나는 신앙 좋은 장로가 되어 후원자가 되자’는 생각이 들어 결국 경제학과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활과 군복무, 그리고 가정에 찾아온 위기 속에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되었습니다. 결국 담임목사님의 조언대로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다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죠.
Q. 그럼 선교의 부르심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요?
A. 대학 졸업 후 신대원 입학 전, 당시 성결대학교 신학과에 재학 중이던 아내의 권유로 말레이시아 단기선교를 가게 됐습니다. 동말레이시아 이반족의 산속 마을에서 예배하던 중,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가 눈물 흘리는 이유를 성령께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반대해서였죠. 그 순간, 예수님께서 제 곁에서 함께 우시며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선교사는 이런 삶이구나"라는 마음이 들었고, 그날 저는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Q. 말레이시아에서의 그 결단 이후 곧바로 선교지로 나가셨나요?
A.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후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로서 한국 목회에 전념했죠. 그러나 익산 신황등교회 사택에서 자녀들이 곰팡이로 자주 병에 걸리자 아내가 기도 중 이런 고백을 드렸다고 합니다.
“아버지, 한국에서 목회 잘 할 테니 선교지 안 가면 안 되나요?” 그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연옥아, 네 자식들이 아프니 마음이 아프지? 그런데 내 자식들도 죽어간다.”
그 말 앞에 우리 부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그 일이 다시 선교의 불을 지폈습니다.
Q. 하나님께서 사모님을 통해서 말씀을 하셨군요. 그럼 그 후로는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요?
A. 그 이후로 저와 아내는 오랫동안 또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다시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교를 나가려고 하니 아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선교훈련을 받고 나가기로 결정하고 알아보던 중 아내에게 하나님이 ‘바울선교회’ 라고 정확하게 말씀해 주셔서 바울 선교회를 통해 선교 훈련을 받고 선교지인 오만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Q. 너무 감동입니다. 혹시 선교지에서 겪은 많은 사역들 중에 기억에 가장 남는 일이 있다면 어떠한 것이 있는지요?
A.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장애인 태권도 사역을 시작하게 인도해준 메이사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저희 가족을 소개할 때 오만의 사슴가족이라고 합니다. 사슴은 경청을 대표하는 동물입니다. 귀가 360도 돌아가는 귀가 엄청 예민한 동물이라서 소리를 잘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냥꾼이 평상시에는 잡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슴이 먹이에 마음이 빼앗겼을때나 짝찍기 기간에 집중력이 흩어져서 사냥 당한다고 합니다.
저희가 오만을 소개할 때 오직 주님만의 약자 오만 이렇게 소개합니다. 한국분들이 오만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기억하기 좋으시라고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오만은 한 여름의 온도가 50도가 넘을 정도가 되는 사막의 나라인 것처럼 오직 주님만 바라보지 않으면, 주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영적으로도 매우 척박한 땅입니다.
Q. 그럼 선교지에서 오직 주님께 온전히 집중만 하게 되셨겠네요?
A. 네, 물론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신 이 땅은 아랍의 다음 세대들 모두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오만의 시골에서는 여성이 15살부터 첫 아기를 낳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평생 8명에서 10명까지 아이를 낳는데 부모로서 준비되지 않은 나이에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다보니 아이들이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거의 방치됩니다.
그래서 제가 태권도를 가르칠 때 또 아내가 종이접기를 가르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아이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수업 시간이 조금 부족해져도 반드시 맨 처음 아이들 이름을 부릅니다. 아이들이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Q. 그렇게 사역 하시는 중 혹시 특별한 경험을 하신 적이 있었는지요?
A. 학교에서 태권도 교사로 일하게 되었을 때인 듯 합니다. 그 태권도 과목은 정규 과정에 속했었는데, 출석을 부르던 때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대답을 못하는 한 아이에게 유독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 이름은 메이사였고 그는 귀신들린 듯한 얼굴로 교실 구석에 앉아 아무 반응도 하지 않던 아이였습니다. 처음엔 저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속 그 아이를 제 마음에 떠올리게 하셨죠. 마침내 포기하고 두 손 들고 메이사에게 다가가 산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알라 야하브치(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라고 속삭였더니, 무표정하던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 작은 미소 하나로 제 사역의 방향이 다시 정해졌습니다.
Q.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제가 듣기로는 장애인 태권도 사역도 시작했다고 하던데요.
A. 맞습니다. 이후 중증 장애 학생들로 구성된 태권도 반을 열게 되었고, 처음엔 혼돈 그 자체였지만, 하나 둘 아이들과 마음이 통해가며 수업은 질서와 웃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아이들과의 시간은 제가 살아 있는 이유이자, 태권도 사역을 포기하지 않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Q. 정말 귀한 결단을 하셨고, 그 결과도 놀랍습니다. 그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이어졌나요?
A. 네, 감사하게도 국경 시골 마을의 작은 사립학교에서 시작된 장애인 태권도 수업은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온라인으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오만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장애인 제자들을 만나게 해주셨고, 나아가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 MK들,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MK들, 그리고 아랍에미리트에 거주하는 MK들까지 연결해 주셨습니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문을 여신 분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선 1편에서는 오만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과 순종 그리고 펜데믹 이전의 사역 내용까지 싣어보았다. 계속해서 다음 편에는 펜데믹 당시와 그 이후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가 2편에서 진행될 것이다. 아무튼 이번 인터뷰는 오만에서 사역 중인 조갈렙 선교사님의 긴 여정을 따라가는 과정에 있다. 그 가운데서, 선교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보는 시간이 되었음을 간증한다.